침 놓던 손으로 링 위에선 선수 손을 번쩍
홍수환 선수 '챔피언 먹을' 때 권투 매력에 푹 빠져버려
1년에 한 달씩 한의원 비우고 전세계 돌며 WBA 주·부심
선수들 부상 예방 위해 한국 홍삼 등 한의학도 소개

남자다운 남자 냄새 맡기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링에 올라가면 원초적인 수컷의 냄새가 납니다. 복서들의 숨소리 하나 하나에서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되고, 펀치가 날아갈 때마다 땀도 튀고 피도 튀지요. 링 안은 고독합니다. 그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지요. 그 좁은 링 안에서 자기 인생을 걸고 싸우는 선수들과 부대끼다 내려오면, 제 몸의 배터리가 꽉 채워지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저는 권투심판입니다. WBA(세계권투협회) 심판 및 PABA(범아시아복싱협회) 심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9년 중국 선양(瀋陽)에서 열린 남·북한 권투 경기에서 공식 심판으로 데뷔한 이래,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열린 탈북(脫北) 여자복서 최현미의 타이틀매치 심판에 이르기까지 타이틀 매치 60여회의 주·부심을 맡았습니다.

제 본업은 한의사입니다. 1982년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1985년 서울 석관동에 백산한의원을 열었어요. 27년째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진료를 합니다. 권투를 시작한 건 1976년 대학에 입학하면서였습니다. 약한 체력을 보강하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권투가 제 '로망'이었거든요. 홍수환 선수가 WBA 밴텀급 세계 챔피언이 되던 1974년 7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라디오로 중계된 그 경기를 들으며 권투에 푹 빠졌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취미로나마 권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어찌나 신나던지요. 1982년, 제 인생에 또 다른 목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서 열리는 헤비급 타이틀 매치 중계방송을 보는데 글쎄 미(美) 연방판사가 주심을 보고 있지 않겠어요?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저는 '한의사로서 세계 타이틀 매치 주심이 돼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지난해 4월 태국 나콘사완에서 열린 PABA 타이틀 매치에서 심판을 맡고 있는 이민영(가운데)씨. 오른쪽 작은 사진은 한의사 이민영씨가 환자에게 침을 놓고 있는 모습. /이민영씨 제공

한의원을 개원한 지 5년쯤 되었을까, 한의원 건너편에 '화랑 복싱체육관'이 들어섰습니다. 홍수환 선수를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었던 김준호 선생님이 트레이너로 영입되었다길래 바로 체육관에 등록했고, 영광스럽게도 그분에게 배우며 복싱 심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착실히 준비했지요. 운 좋게도 1995년 WBA 산하기구로 PABA가 결성되면서 새로운 심판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견습 시절을 거쳐 1999년 데뷔했고, PABA 경력 3년을 인정받아 2001년 일본에서 열린 WBA 수퍼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 부심으로 지명됐습니다.

한의원은 어떻게 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싱 심판을 보냐고요? 심판을 맡는 건 1년에 평균 6회 정도이고, 그때마다 부원장에게 진료를 부탁합니다. 1년에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우는 셈인데, 환자들에겐 정말 죄송하지만 처음엔 불편해하더니 요즘은 많이 이해해 주십니다.

권투 국제심판 활동은 본업에도 도움이 됩니다. 저는 11명으로 구성된 WBA 의무 분과 위원 중 유일한 한의사입니다. WBA는 매년 총회에서 심판 세미나와 함께 메디컬 세미나도 개최하는데, 저는 복서들의 안전과 부상 예방을 위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6년 전엔 호주에서 열린 시합에 갔다가 지난해 타계한 미국의 전설적인 복서 조 프레이저를 만났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펀치로 입은 충격으로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펀치 드렁크'로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어요. 저는 이듬해 '펀치 드렁크 신드롬에 끼치는 한국 홍삼의 효과'란 주제로 박사 학위논문을 완성했고, 그해 연차 총회에서 발표해 열띤 호응을 얻었습니다.

복싱 심판이 되면서 세운 목표 중 하나는 복싱 메카로 알려진 서울 장충체육관, 도쿄 고라쿠엔 경기장,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링에 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2003년 장충체육관에, 2011년 고라쿠엔 링에 서 보았는데 미국은 자기나라 심판만 주심으로 임명하기에 메디슨 스퀘어 가든 링엔 서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음 목표는 WBA와 PABA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고, 더 나이가 들면 감독관으로도 활동하고 싶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인체(人體)를 소우주(小宇宙)라고 여깁니다. 세상 모든 이치가 인체에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죠. 저는 링 또한 소우주라고 생각합니다. 매 경기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으니까요. 매 라운드 최선을 다하는 권투선수들처럼, 우리도 인생이라는 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동갑인 58년생 개띠들에게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팍팍한 세상 살아가느라 다들 힘드시지요? 그래도 제 주변을 보니 우리 나이에 뒤늦게 성공한 사람도 많습디다. 12라운드의 권투처럼, 우리 인생에도 여러 라운드가 있는 건지 모릅니다. 우리 젊은 날에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복싱의 부흥을 꿈꾸며, 모두 다시 한 번 힘을 내 '인생의 챔피언'이 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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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이민영 명예회장님의 일상이 칼럼 형태로 정리되어 기사화 되었습니다.
작년 수료식때 이민영회장님의 특강을 들으신 분들은 직접 보고 들으신 바 있겠지만 신입회원분들을 비롯하여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꺼라 사료되어 이 기사를 게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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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다잘될껴 2012.03.23 12:31

    스포츠한의학회 롤모뎅이십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봉탕 2012.05.11 11:16

    개인적으로 복싱에 참 관심이 많은데...막 휘두르고 버티는 운동 권투가 아니라는걸 알 시대가 다시 올것 같습니다.
    최근... 조금씩 복싱에 대한 관심이..
    언제 뵙고 싶네요.